거대한 도시의 눈을 거슬러 오르는 작은 손
정희우 개인전 <담지도>/ 2013.11.15.~11.30/ 가회동60 갤러리
글 | 이단지, 아르코미술관 큐레이터
박해천의 <아파트게임>에서 언급되었듯이 우리의 아파트라는 것은 급속한 산업화에 따른 중산층 되기를 향한 욕망의 굴레와 같은 것이어서 뚝딱뚝딱 지어진 번듯하고 효율 높은 자부심에 숨겨진 이룰 수 없는 상실과 소외의 빈곤감을 소회하게 만든다. 언제나 속도가 우선시되어온 개발의 역사를 가진 우리는 굳이 아파트에 살고 있지 않더라도 대부분 그것의 자본적 틈바구니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2년전, 결코 짧지 않은 4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두 다리의 걸음 폭만으로 실측한 강남대로의 몸뚱아리를 장지 위에 재구성하기도 한 정희우는 이번 전시에서 보다 ‘땅에 가까운’ 산책으로 기억의 도시를 진술하기에 이른다. 필자가 이것을 ‘땅에 가깝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마치 조감도와도 같았던 장지 작업 <강남대로>에서의 시점이, 이번의 경우에는 돋보기를 가져다 댄 듯 수평적인 손과 팔의 거리(distance)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다. <담지도>의 전면에는 작가의 손으로 여러 번 훑고 만져 수확하였을 ‘탁본’이라는 방법이 두드러진다. 거대한 눈을 대신할 작은 손의 수확은 이번 전시를 축약할 수 있는 태도이다.
수직의 고도성장이 낳은 도시를 훑고 걸어 다니며 그것의 기록을 위해 선택한 “탁본”이라는 채집은 어찌 보면 무모하고도 비효율적인 노력과 같다. ‘별’ 볼일도 없고 눈길을 준적도 없는 아파트의 담장은 일개 정글의 개미와 같은 개인의 일상과 같은 것이기에 더욱 생경하다. <담지도>의 원본으로서의 아파트 ‘담’을 단순히 산업화나 도시라는 거대담론을 연구하기 위한 프레파라트로서의 ‘풍경(landscape)’으로 보기는 힘들 것이다. 정희우가 수행한 ‘가까운’ 거리는 차라리 공공의 공간에서일지언정 시작도 끝도 없이 순환하고 공명하는 (나와 같은) 개인들의 집합된 기억, “장면(scene)", 친밀함으로 소환된 표본이다. 늙은 노인의 피부 껍질과 같은 그것의 표면은 언어나 논리로 설명될 수 없는 일상의 축적, 거시적인 산업화의 흐름을 초월한 미시적인 사람들의 더께가 숨어있다. 도시의 기호를 벗어난 사람들의 신체로서의 담, 그것은 도상으로서의 인공물로 오해될 수도 있지만, 정작 ‘산업화’ 자체에 대한 물음을 전제하지 않는다. 잠시의 머무름과 같은 채집 과정은 사실 시각적인 모습 이면의 문명과 개인의 만남을 전제하는 일이다. 인공물이라는 것은 결국 ‘사라짐’을 담보함으로 ‘지금, 여기’의 순간을 의식하게 하지만, 신체의 운동으로 건져 올린 이번 작업은 현재의 ‘여기’를 더욱 절박하게 각인하는 의식(ritual)의 순간이다. 아파트의 경계나 마천루의 높이와 같은 산업 체제는 시각으로 먼저 다가오지만, 기억은 눈을 벗어난 사건의 촉각, 거친 면으로 모아진다. 역사의 흐름에서 소외되는, 잊혀지는 이들의 삶,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시선과 안에서 더욱 깊은 살결을 들여다 보는 태도는 다른 것이다. 카메라 옵스큐라, 기록의 정확성과 탁본의 그것이 다른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몸속의 한 세포처럼, 우주의 작은 부분처럼, 작가는 우리가 결코 삶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며 생명력을 가진 리듬으로 존재한다는 실존을 손으로 환기한다. 다만 이러한 작업은 사회적 시스템에 의해 통제되는 구조에 대한 정치적 저항이 아니라, 앞서 말한 개인들이 삶과 관계를 통해 쌓아가는 단편적인 순간, 본능적인 찰나에 대한 오마주이다.
정희우 개인전 <담지도>/ 2013.11.15.~11.30/ 가회동60 갤러리
글 | 이단지, 아르코미술관 큐레이터
박해천의 <아파트게임>에서 언급되었듯이 우리의 아파트라는 것은 급속한 산업화에 따른 중산층 되기를 향한 욕망의 굴레와 같은 것이어서 뚝딱뚝딱 지어진 번듯하고 효율 높은 자부심에 숨겨진 이룰 수 없는 상실과 소외의 빈곤감을 소회하게 만든다. 언제나 속도가 우선시되어온 개발의 역사를 가진 우리는 굳이 아파트에 살고 있지 않더라도 대부분 그것의 자본적 틈바구니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2년전, 결코 짧지 않은 4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두 다리의 걸음 폭만으로 실측한 강남대로의 몸뚱아리를 장지 위에 재구성하기도 한 정희우는 이번 전시에서 보다 ‘땅에 가까운’ 산책으로 기억의 도시를 진술하기에 이른다. 필자가 이것을 ‘땅에 가깝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마치 조감도와도 같았던 장지 작업 <강남대로>에서의 시점이, 이번의 경우에는 돋보기를 가져다 댄 듯 수평적인 손과 팔의 거리(distance)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다. <담지도>의 전면에는 작가의 손으로 여러 번 훑고 만져 수확하였을 ‘탁본’이라는 방법이 두드러진다. 거대한 눈을 대신할 작은 손의 수확은 이번 전시를 축약할 수 있는 태도이다.
수직의 고도성장이 낳은 도시를 훑고 걸어 다니며 그것의 기록을 위해 선택한 “탁본”이라는 채집은 어찌 보면 무모하고도 비효율적인 노력과 같다. ‘별’ 볼일도 없고 눈길을 준적도 없는 아파트의 담장은 일개 정글의 개미와 같은 개인의 일상과 같은 것이기에 더욱 생경하다. <담지도>의 원본으로서의 아파트 ‘담’을 단순히 산업화나 도시라는 거대담론을 연구하기 위한 프레파라트로서의 ‘풍경(landscape)’으로 보기는 힘들 것이다. 정희우가 수행한 ‘가까운’ 거리는 차라리 공공의 공간에서일지언정 시작도 끝도 없이 순환하고 공명하는 (나와 같은) 개인들의 집합된 기억, “장면(scene)", 친밀함으로 소환된 표본이다. 늙은 노인의 피부 껍질과 같은 그것의 표면은 언어나 논리로 설명될 수 없는 일상의 축적, 거시적인 산업화의 흐름을 초월한 미시적인 사람들의 더께가 숨어있다. 도시의 기호를 벗어난 사람들의 신체로서의 담, 그것은 도상으로서의 인공물로 오해될 수도 있지만, 정작 ‘산업화’ 자체에 대한 물음을 전제하지 않는다. 잠시의 머무름과 같은 채집 과정은 사실 시각적인 모습 이면의 문명과 개인의 만남을 전제하는 일이다. 인공물이라는 것은 결국 ‘사라짐’을 담보함으로 ‘지금, 여기’의 순간을 의식하게 하지만, 신체의 운동으로 건져 올린 이번 작업은 현재의 ‘여기’를 더욱 절박하게 각인하는 의식(ritual)의 순간이다. 아파트의 경계나 마천루의 높이와 같은 산업 체제는 시각으로 먼저 다가오지만, 기억은 눈을 벗어난 사건의 촉각, 거친 면으로 모아진다. 역사의 흐름에서 소외되는, 잊혀지는 이들의 삶,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시선과 안에서 더욱 깊은 살결을 들여다 보는 태도는 다른 것이다. 카메라 옵스큐라, 기록의 정확성과 탁본의 그것이 다른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몸속의 한 세포처럼, 우주의 작은 부분처럼, 작가는 우리가 결코 삶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며 생명력을 가진 리듬으로 존재한다는 실존을 손으로 환기한다. 다만 이러한 작업은 사회적 시스템에 의해 통제되는 구조에 대한 정치적 저항이 아니라, 앞서 말한 개인들이 삶과 관계를 통해 쌓아가는 단편적인 순간, 본능적인 찰나에 대한 오마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