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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그리다

<시간을 담은 지도> 화가 정희우

강남 한복판, 빼곡한 빌딩 숲 사이 큼지막한 사거리 도로가 그려진 채색수묵화는 정밀한 지도 같다. 화가 정희우는 직접 그 거리를 걸으며 보폭으로 축척을 맞췄다. 그녀는 어쩌면 곧 ‘옛날 풍경’으로 불리게 될 지 모를 서울의 현재를 기록하고 있다.
 
서울, 그중에서도 왜 하필 강남이었나? 어렸을 때 강남이 아닌 지역에서 살았다.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에서 자유롭게 놀았다. 그러다 강남으로 이사를 왔는데, 아파트가 너무 많아 당황했다. 어린 마음에도 되게 재미없어 보였다. 학창 시절을 줄곧 강남에서 보내고 성인이 된 후 집을 알아봤다. 어릴때 살던 동네 쪽을 알아봤는데, 내가 어린 시절 뛰어놀던 동네는 서울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30년 동안 산 강남 아파트가 내겐 추억의 공간이 돼버렸다.

수묵채색화라서 그런지 강남대로를 그린 지도는 마치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보는 느낌이다. 세상의 변화주기가 빠르고,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옛 것이 돼버린다. 지금 이 그림을 지금 그려도 금세 옛날 것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니, 오히려 진짜 옛날 것처럼 보이게 그리는 건 어떨까 싶었다.

작업과정이 궁금하다. 강남 뱅뱅사거리 근처에 작업실을 얻었다. 마치 전망대처럼 공간 면적은 좁고 바깥 풍경만 보이는 길쭉한 공간이다. 일단 작업실 건너편에 있는 건물부터 그리고, 이어서 길을 그렸다. 건물과 공간은 직접 보폭으로 재서 축척을 맞추어 그렸다. 그 방법이 꽤 정확했다. 강남대로가 4.2km인데 4년이 걸렸다. 주변 사람들이 내 작업과정을 듣고는 “구글어스 쓰지!”라며 안타까워했다(웃음). 그렇지만 구글어스도 시점이 있어서 건물 사이의 간격을 자세히 볼 수 없었다. 직접 내가 움직여서 거리를 재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서인지 몸으로 그린 그림처럼 느껴진다.

작업을 하면서 새삼 보였던 강남의 이면이 있나? 10년 전, 어느 날 문득 강남대로를 걷다가 건물에 걸린 간판을 봤다. ‘촌스러운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아무렇게나 걸어놨는데 그 안에서도 질서가 있었다. 어지럽기만 하고, 무질서해 보이는 간판이 그 나름의 생태계를 만든 것 같았다. 그런데 ‘디자인서울’을 하면서 기존 간판을 모두 바꿔버렸다. 글씨도 작고, 단순하게 만든 것이지만, 개성이 없어져서 아쉽다.

종로에 있는 상점 중 나무간판으로 탁본을 떴다. 처음부터 청계천, 종로, 을지로와 같은 곳을 그리고 싶었다. 그러나 강남이라는 뿌리 없는 신도시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곳의 역사를 다룰 자격이 없다고 느껴졌다. 감히 거기부터 손댈 자신이 없어서 강남부터 작업을 시작한 거다. 강남을 그리고 나니 지역을 더 넓힐 수 있다는 마음이 생겼다. 종로는 한국에서 제일 오래된 상업거리이다. 현재 종로 1, 2, 3가는 너무 번화해졌고, 종로 4, 5, 6가는 여전히 약방, 보청기 상점 등과 같은 옛날 업종이 남아있다. 아주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할 만큼 오래된 것, 지금 사라지고 있는 ‘방금 옛 것이 된’ 것을 기록하고 싶었다. 종로 상점의 나무간판도 그렇고 아파트 담도 그런 이유로 작업했다.

이 작업을 하면서 서울을 보는 시선은 어떻게 달라졌나? 뉴스에서 간혹 동네의 벽화를 소개하며 ‘회색 도시에 색깔을 입힌다’라는 말을 한다. 그러면 속으로 ‘색깔 입히지 마! 회색이 어때서?’라고 생각한다(웃음). 자연에서 초록색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처럼 도시는 회색이 자연스럽다. 공기가 회색인게 문제인 거지 건물이 회색인 건 문제가 아니다.

서울 말고 다른 지역을 기록하고 싶은 생각은 없나? 난 나와 매우 가까운 것만을 작업하지만 그와 무관하게 예전부터 꼭 하고 싶은 작업이 있다. 2013년에 개성공단이 중단된 적이 있다. 뉴스에서 사람들이 짐을 싸서 나오는데, 도로 위에 화살표 방향으로 ‘개성공단’이라고 써 있는 걸 봤다. 마치 우리가 서울 도로에서 흔히 보는 것처럼 말이다. 개성은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여겼는데 우리가 평범하게 쓰는 글자와 기호가 써 있는 걸 보니 기분이 묘했다. 정서적으로 개성에 가는 건 달나라를 가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그래서 그곳을 꼭 기록하고 싶었다. 최근에 그 작업을 하기 위해 나를 대신해 허가를 받아줄 수 있는 분을 만났다.

탁본으로 작업한 맨홀이 재미있었다. 도시에서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맨홀이다(웃음). 맨홀로 시대를 구분할 수도 있다. 서울시 마크가 예전과 지금이 다르다. 그 마크만 보면 이 동네가 언제 개발됐는지도 대략 유추할 수 있다.

길거리에서 탁본 작업을 하면서 생긴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없나? 작업하기 전에 조금 무섭고 걱정이 됐다. 혹시 시비 거는 사람이 있을까봐. 그런데 사람들이 우리가 작업하는 모습을 보며 신기해하고 재미있어한다. 한번은 작업실이 있는 건물 근처에 도로 화살표가 보였다. 탁본을 뜨고 싶은데, 주변 사람들의 눈초리 때문에 망설이다 서둘러 작업을 했다. 그런데 주변에 있던 마트 주차요원이 우리를 유심히 바라보는 거다. 불안해서 함께 작업하던 어시스턴트에게 “눈 마주치지 말라”고 했다(웃음). 얼마 있다가 주차요원이 다가오더니 뭐하는 거냐고 물어서 어쩔 수 없이 사정을 말했다. 그러자 그가 “그럼 제가 첫 번째 관객이네요?” 하고 좋아했다. 종로 나무간판을 작업할 때는 상점이 문 닫는 일요일에 가서 탁본을 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마치 동물원에 있는 것처럼 나를 구경했다. 제일 재미있는게 불 구경 아니면 싸움 구경이라고 하지 않나. 그런 구경은 누군가가 불행해지는 건데, 내가 하는 작업은 아무도 불행해지지 않는 구경거리가 된다. 그래서 더 좋다.

작품 소재가 고갈될 일은 없겠다. 맞다(웃음). 사람들이 탁본을 사진 찍듯이 놀이처럼 하면 좋겠다. 예전에 그룹전을 했을 때 참여한 아티스트들의 얼굴, 손, 발과 같은 신체부위를 탁본으로 떠준 적이 있다. 다들 재미있어하고 감동을 받았다. 사진을 찍을 때는 상대와 거리를 두게 되지만 탁본은 그 사람을 직접 만지고 쓰다듬어야만 한다.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고, 밀착되는 느낌을 준다. 사람의 살이 맞닿게 되면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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