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의 경계는 정해져 있지 않다. 150년 전 일본에서 한자어 美術이 처음 생겨난 이후 줄곧 그랬다. 회화는 처음부터 순조롭게 미술에 포함되었지만, 장인의 영역이었던 조각은 서양의 모델링을 받아들이고서야 미술이 되었다. 그 명칭도 조각(彫刻)과 조소(彫塑)를 오갔다. 동아시아 특유의 미술이라고 할 서예는 미술인지 아닌지 논쟁을 거쳐야 했고, 그것도 일부 지역에서만 미술이 되었다. 공예는 한 시기가 지나고서야 미술이 되었다. 도안(圖案)이라는 한자어로 번역되어 처음 등장한 디자인 또한 한 시기가 지나서야 미술에 포함된 장르다. 현대에 들어 미술이 된 설치나 퍼포먼스, 비디오아트는 말할 것도 없고 태초부터 존재했던 인간의 많은 조형활동이 시차를 두고 미술의 일부가 되었다. 미술의 경계는 끝없이 확장되어 왔고, 지금도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탁본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고대 중국의 비석이나 청동기의 명문, 그리고 구양수(歐陽修)와 같은 서예 명가들의 작품이 탑본(搨本)으로도 불린 탁본으로 전해져 왔다. 때로 보존과 전승의 방법으로 탁본이 사용된 것이다. 번지수가 많이 다른 어탁(魚拓)의 예도 있지만, 탁본은 ‘지금 여기’의 흔적을 있는 그대로 남기는 오래고도 굳건한 지혜였던 것이다. 고증학, 금석학이 특히 발달한 청나라 이후의 중국에서도 그랬지만, 조선시대 말기 김정희의 경우 역시 탁본은 학문의 방법론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김정희가 북한산이나 황초령의 진흥왕 순수비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탁본이 크게 쓰인 사실도 이러한 탁본의 가치를 웅변해준다. 동아시아의 오랜 목판인쇄나 목판화 전통에 견주어보면 판화와 탁본도 매우 가까운 분야다. 다만 찍어낸 면의 차이가 있는 정도다. 중국의 화보나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絵) 판화 또한 전근대 동아시아의 조형예술에서는 탁본과 비교될만한 예들이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사실은 근대 중국에서 미술의 일부로 인정되었던 금석(金石)이라는 장르가 탁본의 전통을 기반으로 했다는 점이다. 1929년 중국에서 처음 열린 국가미술전람회인 전국미술전람회(全國美術展覽會)에서는 청동기나 비문 등의 탁본에다 그 조형물에 대한 감상을 한시로 써서 낙관 및 인장을 더하여 출품하였다. 말하자면 탁본과 시와 서, 그 세 가지가 합쳐져 미술이 된 것이다. 금석학의 여운을 배경으로 한 중국 특유의 조형적 전통이 100년 전 미술의 한 장르로 편입된 사정을 말해준다. 생각해보면 탁본은 대단히 심플한 원초적 조형행위다. 물체에 묻어 있는 먼지나 때를 물로 깨끗이 씻어내어 화선지로 덮고 물을 뿌려 압착시킨 다음 먹을 묻힌 솜방망이를 두드려서 찍어내는 일로 마무리된다. 서양의 프로타쥬와 같은 건식탁본의 경우도 거의 같은 프로세스를 거쳐 완성된다. 그리고 탁본은 디지털시대 그 어떤 테크놀로지로도 대체할 수 없는 아날로그적 행위를 거쳐 완성된다. 때로 육체노동에 필적하는 에너지를 쏟고 공을 들이기까지 해야 한다. 문제는 탁본의 내용이다. 정희우의 탁본에는 거리의 맨홀이나 교통안내표지판, 가게의 간판, 아파트단지 철제 울타리 등 실로 다양한 소재가 선택되었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소재의 다양성 이면에 있는 장소선택의 엄격함이다. 그와 같은 태도는 서울의 종로, 그리고 강남과 같이 공간이 가진 역사성에 주목한 결과다. 예를 들면 서울 종로의 간판과 강남대로의 맨홀 등을 탁본하여 한때 그곳에 깃들어 살았던 생생한 현장의 역사와 그곳을 오간 개개인들의 발걸음, 그리고 그들의 눈에 비친 찰나의 기억을 기록했다. 특히 700년 전부터 한국 역사의 중심인 종로에 한 시기 전 줄지어 늘어서 있던 상가의 간판들은 그의 탁본으로 또 다른 생명을 부여받았다. 보청기, 의료기, 과학기기 등의 판매점이나 한의원, 직업소개소 등의 간판 탁본에는 이미 사라져가는 서울의 문화와 역사가 그의 손길을 통해 기록되어 있다. 동업을 하다 분리한 양복점 주인의 미국 동경, 직업소개소나 성악교습소를 거쳐 간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 그들의 꿈과 희노애락 곧, 도시의 미시사가 탁본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강남대로의 노면에 있는 조형물 탁본 또한 이 도시의 일상을 지탱하는 기호의 집합체다. 아스팔트 차로의 화살표를 비롯하여 통신, 수도 등의 설비가 있는 맨홀의 뚜껑, 장애인을 위한 보도블록 등등. 21세기 한국사회 남녀노소의 욕망이 흐르는 핫플레이스에서 언젠가 그들의 시선과 마주했을 이 조형물들은 탁본이라는 특별한 변신을 거쳐 기억의 저장고에 들어갈 채비를 하고 있다. 수년 전 수묵채색으로 그린 강남대로 도시풍경과 짝을 이루어 또 다른 차원의 서사를 펼치고 있는 점도 흥미로운 점이다. 거대도시 서울의 겉표면을 덮고 있는 갖가지 조형물들을 탁본으로 남기고 있는 사실을 고려하면 정희우의 시도는 한강투석 즉, 한강에 돌 던지기 같다. 세월이 흐르고, 사람이 바뀌어 삶이, 문화가 바뀐 먼훗날 그의 탁본은 또 어떤 미술로 남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바로 그 대목에서 그가 지향하고 있는 바는 오래 전 일본 콘 와지로(今和次郞)의 고현학(考現學)이 추구했던 바와도 유사하다는 점을 알게 된다. 시간의 경과 속에서 언젠가 사라져갈 인간 삶의 흔적들을 한쪽은 스케치로, 또 다른 한쪽은 탁본으로 기록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타임캡슐에 선택되지는 못해도 민초의 삶을 지탱하던 그들의 비근한 일상 속 조형물들이 탁본으로 남게 된 경우가 후자의 예다. 물론 두 사람의 작업이 가진 차이는 분명하다. 콘 와지로의 행위는 오늘날 문화연구로 분류될 만한 학문연구를 위한 것이었지만, 정희우의 탁본은 미술을 향한 것이다. 탁본한 대상에 작은 물건이 많다보니 때로 작품의 모뉴멘탈리티를 기대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다. 바로 그 대목에서 쉬빙(徐氷)과 같은 중국의 작가가 만리장성 일부를 탁본한 사례를 떠올리게 된다. 역사적 현장이었던 공간 전체를 탁본으로 재구성하려 했던 정희우의 이전 시도를 다시 주목하게 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소품을 넘어서서 작가의 아우라를 그대로 담은 큰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스케일상의 존재감과 메시지의 톤이 무관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탁본의 과정에 드러난 정희우의 정체는 탁본 게릴라다. 아무도 출입하지 않는 일요일에 남몰래 상가의 간판을 탁본한 일도 있었고, 형광안전조끼를 입은 그와 일행이 차량통행을 막고 노면의 화살표시나 맨홀을 탁본했다고 한다. 맨홀 탁본을 제작할 때는 같은 장소 지면 아래에서 작업을 해야 하는 통신사 직원 또한 우호적인 태도로 방관하더라는 얘기도 전해온다. 그런 에피소드들은 낯선 미술가의 작업에 대해 관대해진 일반인들의 모습을 말해주는 삽화와 같은 장면들이다. 하여간, 그 에피소드 하나하나는 1960년대 일본의 하이레드센터가 연상되는 게릴라의 무용담 수준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수묵오색(水墨五色)은 수묵화의 이론적 출발점이다. 필묵의 조화 곧, 필선의 강약과 수묵의 농담이 표현해내는 삼라만상 천변만화의 광경을 수묵화가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시각을 통해 경험하고 상상할 수 있는 우주의 수많은 장면을 형상화할 수 있는 수묵화의 세계를 떠올려보면 탁본에서 시도할 수 있는 표현의 세계는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고, 무미건조하게까지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먹으로 완성한 탁본이 보여주는 단조로움, 건조함이 채색으로부터의 유혹을 넘어서지 못하고 다양한 색상으로 시도한 ‘덧칠의 맛’에 빠진다면 탁본의 무게나 톤은 반감되고말 것이다. 단색 탁본에 강렬한 임팩트를 부여하는 일은 정희우가 안고 있는 또 하나의 조형적인 숙제인 셈이다.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다. 사진이나 동영상을 포함하여 디지털화한 각종 데이터가 홍수를 이룬 이 시대에 탁본하는 일 자체가 가지는 의미에 관한 것이다. 지난 세월 활기에 넘치던 그 시기 삶을 불러내는 탁본이 사진의 간편함과는 비교할 수 없는 또 다른 현장감과 사람냄새에 더하여 갖고 있는 결정적인 차이 말이다. 탁본에는 사진촬영에 담긴 카메라라고 하는 기계의 단일시점과 투시원근법 즉, 서양의 시방식에 대한 부정의 에토스가 담겨 있다. 전근대 동아시아의 수묵산수화에 드러나 있는 동시다시점이라는 시방식이 소멸해간 역사를 의식하고, 지금은 두루 퍼져 있는 서양의 시방식이 미치지 못하는 틈새에 탁본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으로 문화적 정체성을 환기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화가를 비롯한 많은 미술가들이 여전히 미술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고 있다. ‘무엇을, 어떻게’라는 물음은 결코 진부할 수 없는, 날마다 새로운 화두다. 활성화된 미술시장이 그들의 고민을 해결해줄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자명하다. 미술의 외연은 끝없이 확장되고 있고, 미술가 개인에 대해서는 각자의 조형이념이 진화하고 성숙해질 것을 요구한다. 서울을 탁본하는 일은 문화사를 비롯한 역사학이나 사회학, 문화연구로도 확장될 법한 측면을 갖고 있음에도 그것이 향하고 있는 궁극의 지향점은 미술이라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바로 그 지점에 정희우의 작업이 미술을 향한 여정을 재촉할 필요가 깃들어 있다. 그래서 지금은, 그의 탁본이 더 넓고 풍부한 조형이념으로 무장하여 새로운 미술로 진화해가는지 주목해야 할 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