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ONG HEEW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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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

고층건물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면 재미있는 것 중에 하나는 바닥에 있는 글씨와 도로표시다. 깨알같이 작게 보이는 사람과 차들 가운데 거인이 써놓은 것 같은 커다란 글씨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저렇게 큰 글씨들이 저기 있었나싶다. ‘진입금지’, ‘24시간 버스전용’, ‘일방통행’ 등과 말없이 차를 줄 세우는 차선들, 왼쪽, 오른쪽으로 꺾인 화살표, 너그러운 점선과 크게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실선, 그래도 무서운 노란 두 줄, 등. 문득 도시의 기호들의 위력을 느낀다. 밑에서 보면 나를 기죽게 하던 커다란 버스들이, 위에서 보면 순순히 차선 따라 달리는 모습을 보면 귀엽기마저 하다. 개울을 건널 때 징검다리를 건너듯, 사람들은 까만 물에 흰 돌을 놓은 것처럼 생긴 횡단보도를 건너다닌다.
거대한 도시가 기호에 의해 유기적으로 돌아가고 있고, 그 기호들은 너무 익숙해서 내가 그것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도 잊고 지낸다. 도시를 돌아가게 만드는 엄청난 힘을 지닌 기호들이 이미지로, 풍경으로 스며들어 자리 잡고 있다.
201102

뱅뱅 사거리

20년 전쯤인 것 같다. 강남대로 어느 코너에 청바지 브랜드 '뱅뱅'의 간판이 크게 걸려있었다. 길 설명할 때 지표로 이용하기에 편리한 간판이었다. "쭉 가다보면 왼쪽에 뱅뱅이라고 쓰여 있는 큰 간판이 보이거든요. 그 사거리에서 좌회전해서 오면 되요." 이런 식으로.
그러더니 어느 날 내가 택시를 타고 가는데, 당시는 합승도 좀 하고 그럴 때였던 것 같다. 어떤 사람이 택시를 잡으며 "아저씨 뱅뱅 사거리요" 그러 길래 "풒, 뱅뱅 사거리? 아예 길 이름이 됐네.".라고 생각했다.
그러더니 진짜 아예 길 이름이 되어버렸다. 뱅뱅 사거리가 공식적인 길 이름으로 쓰이기 시작할 때 난 어떤 실망감이 들었다.
봉천동, 팔판동, 이런 곳들은 동네 이름의 유래를 이야기할 때 보통 이렇게 시작한다. "옛날에 이 곳 사람들이 농사지을 때 비가 안 내리면……." "옛날에 이 동네에 판서가 여덟 명이 나와서......" 식으로 내가 모르는 그 어떤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 동네에 대한 신비감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게 뭔가. 뱅뱅 사거리
뱅뱅 사거리 간판을 내가 그렇게 선명하게 봤는데 그게 지명의 기원이 돼버리다니.
아. 강남. 이 신비감 없는 곳
201107


기하학적 풍경

강남대로를 그리는 것은 어떻게 보면 좀 쉽다.
19층 건물의 층수와 창문 개수를 세는 게 좀 일이지만 다 세고 나면 자대고 죽죽 그으면 그리는 건 쉽다. 강남대로뿐만 아니라 도시는 모두 자와 컴퍼스만 있으면 윤곽을 그릴 수 있다. 블레이크의 천지창조에서 신이 컴퍼스를 들고 있는 것이 생각나기도 한다.
도시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이라 인간이 그리기도 쉽다. 그리기 어려운 것은 자연이 만든 것이다.
최근에 지은 건물에는 곡선이 들어가 있거나, 직선이라도 반복적이지 않은 형태로 지어진 것들이 많다. 자연을 닮고자하는 노력이리라. Karim Rashid라는 디자이너가 주목받는 것도 이때문인 것 같다. 그가 디자인했다는 어느 기업의 로고를 보면 컴퍼스로 그릴 수 있는 원이 아닌 유기적인 형태의 링들이 그려져 있다. 기하학적인 도시풍경에 자연을 닮으려는 노력들이다.
20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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